7일차 4/26일(일요일)
여행 일주일째 날, 벌써 집 떠난지 일주일이 되어가는구나.
오늘은 파리북쪽 300km거리에 있는 노르망디해안에 위치한 몽 생 미셸 수도원을 둘러보는 여정,
개선문
숙소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개선문에서 07:00에 버스를 타고 출발함으로 아침 일찍 조용한 시간에 개선문을 자세하게 둘러본다.
프랑스의 국토는 우리나라 5배 넓이이나 하루에 600km 이상 운전금지, 따라서 운전사 2명을 동원하여 110km/h허용속도로 다녀왔다, 고속도로에는 휴게소가 거의 없고, 있다 해도 우리와 같이 다양하지 않고 다만 급한 것 해소 차원만 가능한 수준. 영국과 같은 System이다. 가도가도 밀밭과 샛노란 유체꽃밭만 이어지고 알프스와 스페인 국경 피레네 산맥을 제외하곤 높은 산이라곤 없는 세계최대 농업국, 정말 부러운 나라! 이런 국토를 갖고 있으니 와인이 어떻고 멋이 어떻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부럽다,
옹플뢰르
조수간만의 차 평균11m. 최다 15.8m 우리나라 인천은 쨉도 되지 못한다, 간만의 차가 큼으로 소금끼가 많은 초지(일종의 해초)가 발달하여 양 사육이 되고 있고 이를 재료로 스테이크요리를 제공하는데 이름하여 Presalt, 프레살레, 사전 소금 간이된 양. 점심에 이양으로 양 갈비 스테이크를 먹었다, 특산물 사과와인과 함께,
옹플뢰르, 몽 생 미셸을 가는 길에 들르게 되는 노르망디지역에서 가장전략적 요충지역이며 파리의 교두보인 지역이라고 한다,
파리에서 세느강을 따라 북쪽에 위치하며
파리시청사도 150년전만해도 수로와 연결되어 부두가 설치되어 있는 것과 같이 파리는 내륙도시가 아니라 항구도시이다.
즉 옹플뢰르는 파리로 들어가는 모든 내륙화물의 교역 중심지이다.
군사도시인 루앙과 옹플뢰르는 파리의 교두보로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도 시로써 번창했었다, 그러나 항구수심이 5.5m로써 1850년대까지는 선박이 운항되면서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이후부터는 대형선박의 운항에 따라 이웃 르와브르(수심12m)에 신 항구가 건설됨에 따라 인구가 반으로 줄었고 다행인지 모르지만 도시가 쇄락함으로 이후 18세기 모습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현재는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예술가들이 많이 배출된 지역이라 한다,
우리가 초등학교 미술에서 배워 잘 알고 있는 클러드 모네의 주요 작품무대이며 당시 모습이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어져 있다고 한다..
나는 어제 오르세 미술관 투어를 하며 클러드 모네의 작품세계에 대해 조금은 이해를 하는 기회가 되었는데, 모네는 전성기 이후에는 사실적이 아닌 빛과 색에 매료되었고 또 백내장으로 형상을 자세히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그림,작품에는 빛과 색만을 강조했지만 그러나 젊었던 시절, 옹플뢰르에서 작품을 할 시절에는 그곳의 풍경을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그려서 현재 잘 보존된 이곳의 풍경과도 너무나 흡사하여 당시로 돌아간 느낌을 갖게 하는구나
옹플뢰르에는 오래된 목조 성당이 있으며 건축하게 된 동기는 100년전쟁중 영국과 5번이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하여 더 이상 전쟁을 없었으면 하는 기원에서 정성(모금)을 모아 목조의 성당을 건축했으며 건물의 형상은 배를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성전건축으로 마침 내가 방문했을 때가 주일 미사를 하는 중으로 프랑스 미사를 체험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옹플뢰르 항구
목조 성당(배를 뒤집어 놓은 형상)
성서에 나오는 세 천사 이야기,
가톨릭관련 아니 유럽 주요미술관에 전시된 많은 성화와 관련된 내용으로써 성화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먼저 가브리엘 대천사는 성모마리아에게 원죄 없이 잉태하심을 알린 즉 "수태고지" 성화에 나오는 천사이며 마리아께서도 꼭 푸른색 옷을 입으시고 수선화 꽃이 등장하는 성화에 그려지는 대천사이다.
다음은 몽 생미셸의 건축과 관련된 미카엘 대천사,
대 군단장으로써 갑옷을 착용하고 검을 들고 용의 머리를 즉 악마를 제압하고
손가락은 늘 하늘로 하고 시선은 아래로 하여 우리를 지켜주시는 천사이며, 최후의 날 심판자의 역할을 하며, 그 이름의 유래는 타락천사 대천사인 루시퍼를 제압하면서 외친 "누가 감히 하느님과 같아지려 하는가?" 의 라틴어가 바로 "미카엘" 이라고 한다
파리 시내 나폴레옹 3세가 건축한 천사상도 어제 보았으며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세 번째 라파엘 대천사!
치유의 천사이며 토빗의 눈을 뜨게 해준 천사로 성화(聖畵)에 아들 토비야가 물고기를 들고 등장하며, 토빗은 성화에서 눈을 뜨게 해준 천사에 감사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몽 생 미셸
1000년에 걸쳐 건축한 성체 수도원으로 영국과 100년전쟁시 전략지로 영국에서는 이곳을 점령하면 주변 강(江)을 통해 프랑스 내륙점령이 용이하고 또 미카엘 대천사의 계시로 건립된 성당인 만큼 점령에 따른 승리의 계시를 이용한 사기문제로 활용할 수 있음으로 인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한 곳이며 또한 2차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개된 것도 근방임.
이수도원은 가장 높은 밀물 때에는 주변 전체가 바다 물이 들어와 요새로 쓰이던 암초에 건축되었으며, 최초의 건축물은 6세기경 수도사들이 살던 조그마한 교회에서부터 시작하여 708년 오베르 주교가 건축을 착수하였다고 한다
암초 요새에 건축된 수도원
건축물의 양식은 장기간 건축에 따라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에 고딕양식의 첨탑이 올라가는 등 다양한 건축양식이 혼재되어 있으며, 1300년된 건축물이며 본당 건축에만도 800년걸려서 건축되었다고 하며,
뾰쪽한 바위산에 이곳의 주교(오베르 주교.)에게 가브리얼 대천사께서 성전을 건축할 것을 계시하여 설립된 것으로 성전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주변을 먼저 건축하고 성전을 건축하였으나 하부의 붕괴로 성전이 붕괴되어 재건축을 여러 해에 걸쳐 진행됨으로 인해 먼저 건축된 제대부분이 최신의 건축양식인 고딕(붕괴 후 늦은 시점에 재건축한 증거)이고 회중석 부분이 로마네스크양식을 채용한 이유로 설명이 된다.
중앙 정원과 성전 외벽 고딕 양식의 첨탑 내부
테라스에서 바라본 전경
회랑으로 이어진 기도실
이곳은 자치구역으로 시청, 우편국 등 모든 관공서가 있으나 상주인원은 13명 뿐이라 한다,
아쉬운 점은 이 정도의 수도원이라면 종교적인 보물과 많은 역사와 문화, 예술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시민혁명 후 감옥소로 사용됨에 따른 모든 자료를 주변교회로 이동, 보관하였으나 이후 붕괴된 건축물을 보수하고 1차대전으로인해 자료의 이동이 지연되다가 2차 세계대전 말미에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점에 자료보관 성당지역에 독일주력부대 주둔지로써 연합군의 폭격으로 자료를 보관하던 도시전체가 파괴되어 자료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하며 이로 인해 성체 몽 생 미셸 내부 미로와 Room의 용도까지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좀 슬프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구나.
다행히 최근 발굴로 조금씩 베일을 밝혀내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참 슬픈 역사를 지닌 수도원이다.
성상파괴(프랑스 시민혁명시)로 인한 머리가 없는 삐에타 상
성체 외곽 전경
수도원에서는 과거의 슬픈사건을 오래 기억, 반성하기위해(종교의 입장에서) 보존중이라 한다
잘 알다시피 중세 유럽에서의 가톨릭의 영향력과 가난했던 서민과 소작인들의 생활상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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