ᆞ 6일차 4/25일(토요일, 파리 여행)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과 몽마르트르 여정
예술과 낭만을 주제로 시작하여 Rest와 Art를 체험하는 오늘의 여정.
어제 밤 유럽 중에서 가장 선진국인 영국의 항공사, 비록 저가항공이지만 2시간 가까이 출발이 지연되어 당초보다도 많이 늦은 한 밤중에 예술과 문화와 낭만의 도시, 빠리지엥들이 살고 있는 파리에 도착하였다.
숙소는 내가 이곳에 출장 다니면서 조금은 익숙한 지역인 구 시가지와 La Defense가 만나는 지점인 Porte Maillot 지역. Malakoff가에 위치한 The Hotel Residence를 정했는데 금번의 선택은 우리를 영국에서와 달리 외면하지 않고 아늑한 안식을 주는 것 같구나.
비록 포테마요역에서 게이트를 잘못 찾아서 헤매었지만 정말 멋지고 친절한 젊은 커플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쉽게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아마 그 커플 복 받을 겨!
아침 여정을 시작하며 제일먼저 우리를 마주한 것은 미카엘 대천사상!
갑옷, 칼을 착용하고 마귀를 처단하는 형상으로 손가락을 하늘로 가르치는 모습은 그 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의미이며, 나폴레옹 3세가 1860년대 이곳 파리 구시가지를 개선 재개발 할 때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이 동상을 세우고 도시재개발이 신의 뜻임을 부여함.
미카엘 대천사 상
파리 도심의 계획된 전경-너무나 멋짐
먼저 이 도시가 이렇게도 아름답고 문화와 낭만이 넘치는 도시가 된 데에는 나폴레옹3세의 도시 재개발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도 10여년전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 어떻게 이런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을까 부러웠고 궁금했는데 이는 150년전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질서했던 파리도시를 재개발한 나폴레옹3세의 열정의 결과가 이 도시뿐만 아니라 파리쟁의들의 의식도 개선하여 오늘의 프랑스를 있게 하지 않았나 생각하게 한다.
19세기 프랑스 부르조아들의 하루 일상을 체험하는 기분으로 카페 Le Royal Orsay에서 프랑스 에스프레소와 함께 여정을 시작해본다
보들레르는 지식인은 커피를 마신다고 했던가!!
오르세 미술관
1900년 당초 만국 박람회 때에 건립된 기차역이었으나 이후 기차 Size가 커짐으로 인해 더 이상 사용이 불가하여 미술관으로 용도를 변경하였으며, 本 건축물의 특징이 철골과 유리로 되어 건물 자체적으로도 멋진 조형미를 갖추고 있으며,
반 고흐, 고갱, 르노와르 등 인상파의 미술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오르세 미술관
내부 전시실 전경
인상파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게 된 동기는 어떤 기자가 이들의 전시회를 보고 "좋지는 않다(not bad)"라는 의미로 “인상주의적” 이네라고 평을 한데서부터 인상파의 이름이 시작되었으며,
19세기 사회가 빠르게 변화되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미술계에서는 변화기 없었고 또 당시 미술은 후원에 의해서만 작품활동이 가능하여 정부나 종교계, 부르조아의 요구에 따라 작가의 개성이나 특징은 무시되고 고객이 좋아하는 방향으로만 활동이 이루어지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인상파를 중심으로 원근, 명암법 등 혁신적이 활동이 이루어지고, 기차 등 교통의 발전으로 야외 풍경화 중심의 작품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어 인상파 회화가 활발하게 되었다.
르노와르 사투의 철교
모네의 전성기 작품(야외에서 인물 그리기)
전시는 0층은 1848년대까지 화가의 눈에 비치 자연주의, 사실적인 것을 벗어나지 못한 그림인 모네의
저녁기도, 이삭줍기 등이 전시되어 있고,
이삭줍기, 저녁기도 작품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상태가 좋지 못하여 올리지 못해 아쉽다.
1863년도 작으로 명암, 원근법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음으로 혹평을 받았던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식사, 이 작품은 누드 작품으로 그 당시 미술에서 여신은 누드로 그렸으나 일반여성, 전문직?여성을 누드화로 그린 것은 처음이었고, 또 당시 부르조아들의 은밀한 사생활과 방탕함에 대해 표현함으로 인해 주제 자체에 거부감으로 혹평을 받은 작품이다.
마네는 왜 욕먹을 줄 알면서 출품했는가? 이를 통해 미술계를 리드함으로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며, 나아가 그의 역할을 인정 밭아 인상파의 아버지로 평가되었다고 한다(사진을 올리지 못해 아쉽다.)
마네의 풀밭위의 식사
Mr.크루베라는 작가는 고객으로부터 천사를 그려줄 것을 요청 받았을 때 " 대려 오면 그려주겠다 했다""고하며, 즉 작가로서 자유선언을 한 것 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피리 부는 소년" 그림도 있고,
5층에는 전성기의 끌로드 모네의 빛을 그린 그림과 연작시리즈 루앙 대성당과 수련의 연작이 전시되어있고,
빛에 매료되어 야외 작품활동 주로 하였으며,
말년에 시력문제로 작품이 추상적으로 변한 것 같은 경향이 있으나 있는 그대로 그린 진정한 인상파 화가인 것 같다고 생각된다.
모네의 수련 연작
에드가 드갈은 시력 문제로 실내에서 무희중심의 작품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고
르노와르의 그림소재는 행복을 표현하는 것으로 어린 여자아이를 소재로 많이 채용한 것을 볼수있고,
2층은 후기 인상파 작가인 빈센트 반 고흐 작품으로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그리고 고흐와 고갱의 만남을 통해 그린 그들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고 특히 왜 귀가 잘린 그런 자화상을 그렸는지를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다.
고흐가 몽마르트르에서 예술가들과 작업하는 과정이 효과적임을 알고 자신의 남부 아트리에에 화가들을 초청했으나 아무도 동참해주지 않음에 동생이 고갱에게 부탁하여 동참하게 되었고 이후 고흐가 그린 자화상에 대한 고갱의 비평, 어떻게 자화상이 당신을 닮았는가라는 비평에 고흐는 자신의 귓뽈을 제거하고 자화상을 수정한 것 에 대한 고흐의 광기 같은 행동을 보고 고갱은 고흐를 떠나게 되며,
이로 인해 고흐는 고갱과 해어지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며, 더욱 정열적으로 작품을 남기게 되고 특히
자화상을 많이 남기게 된다.
고흐는 그림에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었으며 그래서 인상주의 겸 표현주의 작가로 평가 받는다.
영국 National Gallery에서 감상한 보티첼리의 "비너스탄생" 계란 템페라와 유화를 혼용한 누드화와
의심하는 도마를 그리 성화
세잔느 등 수많은 인상파화가들의 고뇌와 사랑과 낭만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참고로 최근 그림경매가 가 가장 높은 화가는 고갱의 그림이라고 하네요.
조각 작품도 전시중이다.
파리 오페라 극장건축물
1860년대 착공하여 1873?년 준공, 나폴레옹 3세가 공모하여 무명의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가 설계하였으며, 건축가는 건축물의 요소요소에 나폴레옹3세황제의 상징을 표현했는데 지붕의 청동색 돔에는 황제의 제관을 상징했고, 외벽에 표시한 알파벳 N은 나폴레옹을, E는 애인(Eugenia외제니 황후- 이름이 너무 길어 모두 적을 수 없음.)의 이름을 표현했다.
청동상에 금박을 입혔고, 기본으로 루이 16세때에 유행했던 양식인 바로코 로코코양식에 로마양식과 로마네스크를 모두 적용함으로 얼핏 국적이 없는 양식 같아 보였으나 건축가는 이것이 나폴레옹 양식이라고 주장하고 황제 또한 수긍하여 오늘의 상징적이며 파리쟁의들의 문화의 터전으로 남게 되었다.
오페라 극장 오페라극장에서 바라본 루브르 궁(박물관)
파리중심가의 도시계획상 건물의 배치를 보면
중심 축으로써 오페라 극장과 루브르 궁(현 박물관)은 일직선상에 오뻬하 에브뉴(Avenue)를 두고 양끝 단에 마주보고 위치하며, 원래 에브뉴라는 명칭은 가로수가 있는 거리를 뜻하나 경관을 고려해서 모든 가로수를 뽑아버렸다고 하다. 내가 보아도 잘한 것 같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 건축물은 "오페라유령"의 무대가 되는데 이는 준공 시 내부 상데리아 조명이 추락으로 사람이 사망한 것과 건축하는 과정에 과도한 지하수위 문제로 재대로 된 건축물을 완공할 수 있을까 하는 배경에서 작곡되었다고 한다..
당시 파리의 부르조아들은 극장 바로 옆에 위치한 Cafe de la paix에서 차를 마시고 오페라를 구경하고 빠사주에 가서 명품을 구매하며 낭만과 허세를 부리는 것이 이들의 일상이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오늘의 프랑스 문화와 예술 및 경제를 이룩했다는 논리에는 결코 우리 같이 힘들게 경제를 일으켜 세운 나라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현실인 것 같아 씁쓰레한 기분이 드는 것 같다.
Cafe de la paix (카페) 빠사주
빠사주,
귀족들의 명품 상점, 150년전에 벌써 철골과 유리로 상가건물을 건축하여 당시 빠리쟁의들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상류사회를 구성하게 했다고 한다
점심으로 파리에서의 프랑스풍 고급 피지(? 비싸게 먹었다)를, 소시지와 햄이 듬북 올라간 피자를 레스토랑 테라스 식탁에서 나는 맛있게 즐기고 바로 길 건너에 있는 멋진 성당도 구경한다.
몽마르트르
미술가와 모델과의 사랑 이야기와 그들의 보금자리, 또한 그들의 애환을 함께하며100년전이나 변함없는 그 길을 그때의 느낌으로 같이해본다
화가 피카소 여인 5명중 자살 2명, 정신병원 입원 3명, 82세에 결혼했던 38세대의 여인은 피카소가 죽은 뒤 두문불출하다가 자살하며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어떤 젊은 사람보다도 더 젊었던 사람과 살다가 이제 더 이상 살아있다는 것이 의미가 없음으로 자살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남자로써 피카소라는 남자가 새삼 존경스럽고 부러워짐을 느끼게 하며, 내 자신을 더욱 적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몽마르트르 언덕, 몇 년전(前) 출장 길에는 차를 타고 오른다고 몰랐었는데 오늘은 시내버스를 타고 아래까지 왔어 케이블카를 타고 언덕에 있는 성당까지 올라다가, 내려오면서는 골목을 걸어서 가난한 예술가들의 자취를 같이하며 내려왔는데, 정말 멋진 곳이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곳이다. 예술가들의 숙소, 또 그들이 즐겨 다녔던 카페 등 그들의 자취를 더듬으며,
언덕에서는 광장주변의 카페에서 맥주한잔을 하면서 지금도 가난하게 길거리에서 꿈을 펼치고 있는 길거리예술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화가들이 자신들만의 화풍을 구축하고 고객들과의 관계를 이어감
몽마르트르 거리 몽마르트르 거리의 화가
카페에서 맥주와 커피 뒷 골목
사크레쿼르 성당
까데드랄(Cathedral)성당(주교좌성당)인 사크레쿼르 성당은 보불전쟁에서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파리시민의 성금으로 건축하였으며 규모가 크고 참 아름다운 비잔틴양식의 성당이다.
내부 사진은 지면 관계로 생략한다, 멋지다.
에펠타워
1889년 프랑스 혁명100주년 기념건축물로써 만국박람회장으로 사용되었으며, 높이 198m
20년 존치(存置) 조건으로 건립되었으나 지금은 파리 아니 프랑스의 랜드마크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 타워를 가장 싫어했던 사람인 모파상은 보기가 싫어서 점심을 타워 안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고 한다, 그래야만 타워를 안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네. 허허 맞는 말이네.
저녁무렵 에펠 탑 야경의 에펠 탑
세느강 우람선 바트무슈를타고 바라본 주변 야경, 노틀담 드 파리 종탑
7일차 4/26일(일요일)
여행 일주일째 날, 벌써 집 떠난지 일주일이 되어가는구나.
오늘은 파리북쪽 300km거리에 있는 노르망디해안에 위치한 몽 생 미셸 수도원을 둘러보는 여정,
개선문
숙소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개선문에서 07:00에 버스를 타고 출발함으로 아침 일찍 조용한 시간에 개선문을 자세하게 둘러본다.
프랑스의 국토는 우리나라 5배 넓이이나 하루에 600km 이상 운전금지, 따라서 운전사 2명을 동원하여 110km/h허용속도로 다녀왔다, 고속도로에는 휴게소가 거의 없고, 있다 해도 우리와 같이 다양하지 않고 다만 급한 것 해소 차원만 가능한 수준. 영국과 같은 System이다. 가도가도 밀밭과 샛노란 유체꽃밭만 이어지고 알프스와 스페인 국경 피레네 산맥을 제외하곤 높은 산이라곤 없는 세계최대 농업국, 정말 부러운 나라! 이런 국토를 갖고 있으니 와인이 어떻고 멋이 어떻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부럽다,
옹플뢰르
조수간만의 차 평균11m. 최다 15.8m 우리나라 인천은 쨉도 되지 못한다, 간만의 차가 큼으로 소금끼가 많은 초지(일종의 해초)가 발달하여 양 사육이 되고 있고 이를 재료로 스테이크요리를 제공하는데 이름하여 Presalt, 프레살레, 사전 소금 간이된 양. 점심에 이양으로 양 갈비 스테이크를 먹었다, 특산물 사과와인과 함께,
옹플뢰르, 몽 생 미셸을 가는 길에 들르게 되는 노르망디지역에서 가장전략적 요충지역이며 파리의 교두보인 지역이라고 한다,
파리에서 세느강을 따라 북쪽에 위치하며
파리시청사도 150년전만해도 수로와 연결되어 부두가 설치되어 있는 것과 같이 파리는 내륙도시가 아니라 항구도시이다.
즉 옹플뢰르는 파리로 들어가는 모든 내륙화물의 교역 중심지이다.
군사도시인 루앙과 옹플뢰르는 파리의 교두보로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도 시로써 번창했었다, 그러나 항구수심이 5.5m로써 1850년대까지는 선박이 운항되면서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이후부터는 대형선박의 운항에 따라 이웃 르와브르(수심12m)에 신 항구가 건설됨에 따라 인구가 반으로 줄었고 다행인지 모르지만 도시가 쇄락함으로 이후 18세기 모습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현재는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예술가들이 많이 배출된 지역이라 한다,
우리가 초등학교 미술에서 배워 잘 알고 있는 클러드 모네의 주요 작품무대이며 당시 모습이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어져 있다고 한다..
나는 어제 오르세 미술관 투어를 하며 클러드 모네의 작품세계에 대해 조금은 이해를 하는 기회가 되었는데, 모네는 전성기 이후에는 사실적이 아닌 빛과 색에 매료되었고 또 백내장으로 형상을 자세히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그림,작품에는 빛과 색만을 강조했지만 그러나 젊었던 시절, 옹플뢰르에서 작품을 할 시절에는 그곳의 풍경을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그려서 현재 잘 보존된 이곳의 풍경과도 너무나 흡사하여 당시로 돌아간 느낌을 갖게 하는구나
옹플뢰르에는 오래된 목조 성당이 있으며 건축하게 된 동기는 100년전쟁중 영국과 5번이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하여 더 이상 전쟁을 없었으면 하는 기원에서 정성(모금)을 모아 목조의 성당을 건축했으며 건물의 형상은 배를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성전건축으로 마침 내가 방문했을 때가 주일 미사를 하는 중으로 프랑스 미사를 체험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옹플뢰르 항구 목조 성당(배를 뒤집어 놓은 형상)
성서에 나오는 세 천사 이야기,
가톨릭관련 아니 유럽 주요미술관에 전시된 많은 성화와 관련된 내용으로써 성화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먼저 가브리엘 대천사는 성모마리아에게 원죄 없이 잉태하심을 알린 즉 "수태고지" 성화에 나오는 천사이며 마리아께서도 꼭 푸른색 옷을 입으시고 수선화 꽃이 등장하는 성화에 그려지는 대천사이다.
다음은 몽 생미셸의 건축과 관련된 미카엘 대천사,
대 군단장으로써 갑옷을 착용하고 검을 들고 용의 머리를 즉 악마를 제압하고
손가락은 늘 하늘로 하고 시선은 아래로 하여 우리를 지켜주시는 천사이며, 최후의 날 심판자의 역할을 하며, 그 이름의 유래는 타락천사 대천사인 루시퍼를 제압하면서 외친 "누가 감히 하느님과 같아지려 하는가?" 의 라틴어가 바로 "미카엘" 이라고 한다
파리 시내 나폴레옹 3세가 건축한 천사상도 어제 보았으며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세 번째 라파엘 대천사!
치유의 천사이며 토빗의 눈을 뜨게 해준 천사로 성화(聖畵)에 아들 토비야가 물고기를 들고 등장하며, 토빗은 성화에서 눈을 뜨게 해준 천사에 감사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몽 생 미셸
1000년에 걸쳐 건축한 성체 수도원으로 영국과 100년전쟁시 전략지로 영국에서는 이곳을 점령하면 주변 강(江)을 통해 프랑스 내륙점령이 용이하고 또 미카엘 대천사의 계시로 건립된 성당인 만큼 점령에 따른 승리의 계시를 이용한 사기문제로 활용할 수 있음으로 인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한 곳이며 또한 2차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개된 것도 근방임.
이수도원은 가장 높은 밀물 때에는 주변 전체가 바다 물이 들어와 요새로 쓰이던 암초에 건축되었으며, 최초의 건축물은 6세기경 수도사들이 살던 조그마한 교회에서부터 시작하여 708년 오베르 주교가 건축을 착수하였다고 한다
암초 요새에 건축된 수도원
건축물의 양식은 장기간 건축에 따라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에 고딕양식의 첨탑이 올라가는 등 다양한 건축양식이 혼재되어 있으며, 1300년된 건축물이며 본당 건축에만도 800년걸려서 건축되었다고 하며,
뾰쪽한 바위산에 이곳의 주교(오베르 주교.)에게 가브리얼 대천사께서 성전을 건축할 것을 계시하여 설립된 것으로 성전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주변을 먼저 건축하고 성전을 건축하였으나 하부의 붕괴로 성전이 붕괴되어 재건축을 여러 해에 걸쳐 진행됨으로 인해 먼저 건축된 제대부분이 최신의 건축양식인 고딕(붕괴 후 늦은 시점에 재건축한 증거)이고 회중석 부분이 로마네스크양식을 채용한 이유로 설명이 된다.
중앙 정원과 성전 외벽 고딕 양식의 첨탑 내부
테라스에서 바라본 전경 회랑으로 이어진 기도실
이곳은 자치구역으로 시청, 우편국 등 모든 관공서가 있으나 상주인원은 13명 뿐이라 한다,
다행히 최근 발굴로 조금씩 베일을 밝혀내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참 슬픈 역사를 지닌 수도원이다.
수도원에서는 과거의 슬픈사건을 오래 기억, 반성하기위해(종교의 입장에서) 보존중이라 한다
잘 알다시피 중세 유럽에서의 가톨릭의 영향력과 가난했던 서민과 소작인들의 생활상을.
8일차 4/27일(월요일)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에펠타워에 오르다.
아침 일찍 숙소에서 걸어서 15분거리에 있는 에펠타워에 도착하여 한겨울 같은 추위에 떨며 긴 줄의 뒤에서서 1시간 반을 기다리다 9시반에 엘리베이터로 타워의 정상에 오른다.
에펠타워에서 바라본 파리 구(舊)도심(都心) 경관
파리 도시의 조망!
몇 년 전(前) 처음 파리에 출장 와서 Porte Maillot 지역에 있는 숙소, 하이야트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서 처음 보고 느꼈던 감동(감동이 지나쳐 가슴이 곽 막혔었다) 만큼은 아니었지만 다시 보아도 정말 황홀하고 멋지지 않는가!!
18세기 나폴레옹3세는 미로와 같았던 파리시내를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도시계획 및 재개발을 실시하여 자손만대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한 것에 경의와 부러움을 표한다.
신(新)개선문이 있는 라데팡스에서 개선문을 거처 콩코드광장까지의 대로, 상제리제 거리(한번 흥얼 거려 보세요, 오- 상제리제 라고!)인 이 축을 기준으로 해서 모든 도로와 광장을 배치하였고, 또 다른 축으로 오페라 하우스와 루브르 궁전(박물관)을 연결하는 에브뉴를 축으로 재개발하고 정비하여 오늘날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 파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어떤 지도자가 이보다 더 좋은 보물과 영광을 후손에게 물려 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보면 우리지도자는 이보다 더 큰 영광을 우리 물려준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보다. 이들에게는 벌써 많은 것이 있었지만 우리는 정말 빈손으로 시작해서 오늘의 영광을 있게 한 것이니 말이다.
노틀담 드 파리
이어서 프랑스 파리의 주교좌 성당(Cathedral)인 노틀담 드 파리를 방문하여 웅장한 모습과 장기간에 걸쳐 건축하고 보수한 History 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도 여유를 갖고 준비를 한다면 더 멋진 성당을 건축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Notre Dome이라는 이름은 “우리의 성모”라는 뜻으로 1163년 착공하여 1330년에 준공하였으며, 중세 건축기술이 집약된 고딕 양식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성당정면 가운데 문에 있는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한 도상이 유명한대 원래의 것은 보수도중 파괴되어 1856년에 보수했다고 한다.
성당 전면
성전에 들어서면 대형의 기둥과 고딕아치가 만들어낸 너무나도 큰 공간에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것 같아 압도당하고 상부의 측면 창인 바실리카 창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빛은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프랑스의 국력과 국교로써의 가톨릭의 위상을 느끼게 하는 성전이다. 10년전 방문했을 때 구입한 기념메달을 나는 아직 기지고 있다.
또 내부의 외벽에 따라가며 설치된 각 경당(카펠라)에서는 성전건축에 공헌(봉헌) 가문(家門)에서 기도할 수 있는 구분된 공간(카펠라)을 마련 해두었고 또 각 가문에서 특색 있게 꾸며놓은 것 자체가 예술이다.
제대와 중앙회중석 부분에는 그야말로 성전의 중심으로써 장중함을 느끼게 한다.
내 카메라를 성수에 담그는 행운?을 가짐으로 인해 이후 카메라와는 결별하는 사태가 벌어짐.
중앙 회중석 천정 상부의 리브(Rib-건축용어)와 아치(Arch) 구조 회중석옆 통로 공간 상부의 리브와 아치 구조
스테인드그라스
루브르박물관
루브르 전면 전경 루브르 주면의 전경(주변 전체가 문화제급의 건축물)
루브르 내 유리 피라미드 루브르 박물관 전경
이어서 걸어서 20분거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여 Collection된 방대한 예술품, 전시품을
둘러보며, 그 규모가 이방인을 위축하게 하는 것 같다.
회화, 그것도 중세 성화는 전시된 규모에 먼저 질려 버릴 정도이다,
또 비너스를 비롯한 조각 또한 너무나 방대하고 멋져서 이 사람들이 이집트나 그리스에서 했던 것과 같이 나도 몇 점 내 차에 실어와서 우리 성당에 두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보아도 보아도 끝이 없는 예술품, 정말 부럽다는 생각만 자꾸 드는구나.
루브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그림을 소장한 미술관 중의 하나이며, 이들 작품은 인상파에 이르기까지 유럽 모든 시대를 대표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소장된 15~19세기 프랑스 그림들은 세계 최고이며, 또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화가, 바로크 시대와 네덜란드 화가들의 걸작도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중세, 르네상스, 현대 예술품 전시장에는 프랑스 왕들의 보물인 청동제품, 도자기 등이,
그리스, 로마 고대미술품에는 건축물, 조각품, 모자이크 등이 전시되어 있다.(이 분들이 남의 것을 통째로 띁어다 옮겨놓았다.
이집트 고대예술품 전시장은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당시 가져온 수집품을 체계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그 외 동방의 고대예술품과 그리스도교 고대 예술품 전시실도 별도 마련되어있다,
많은 회화와 비너스상 등 많이 알려진 조각작품을 관람하고 프랑스 ORY공항을 통해 ROMA으로 이동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너스
미로의 비너스 상 사모트라케의 니케(BC200년그리스 조각)
프랑스에서의 여행은 그간 출장중 몇번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계획대로 잘 진행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도심 개선문근처에 숙소를 정하여 어디든지 걸어서, 지하철로서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어서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았고 비용도 줄 일 수 있었다. 그리고 맛있는 과일과 와인을 즐길시간을 가졌었고, 또 음식도 입맛에 맞게 즐겼던 것 같다.
특히 장시간 줄서기로 인해 올라가기 어려웠던(나는 그간 2번 시도했다가 포기함) 에펠탑은 비록 추위에 떨었지만 많이 기다리지 않고 승선하여 멋진 경관을 집사람과 즐길 수 있었던 것이 참 좋았던 것 같다.
몽마르트르! 업무후 저녁에 혼자서 방문한 경험이 있었으나 금번에 가이드랑 걸어서 오르내리는 과정에 예술가들의 생활과 추억과 사랑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참 좋았던 시간이었다.
오페라하우스와 옆의 카페 그리고 빠사주를 방문할때는 내가 마치 파리의 브르조아, 아니 그냥 멋쟁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가톨릭 신자로써 로틀담성당과 몽생미쉘을 방문 할때는 신앙의 깊이를 느끼는 반면 목이 잘린 삐에따상을 볼때는 종교로인해 피박 받았던 서민들의 울분과 시민혁명의 외침을 느꼈고, 파괴된 피에따상을 보존하고있는 마음을 통해 내 자신도 그들의 통회와 고해에 동참함을 느낀다.
베르사이유궁전은 내가 방문한 경험에 의하면 파리시내 다른 궁정 건축물과 별 차이가 없음으로 인해 생략하였으며,
다만 짧은 일정으로 인해 루부르에서 많은 시간을 기잘수 없었고 하루쯤만 여유가 더 있었드라면
집사람 손잡고 상젤리제거리와 도심 구석구석을 걸어서 구경을 할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안전하고 건강하게 프랑스와의 추억을 쌓고 오늘 밤 이탈리아 로마로 넘어 간다.
새로운 문화와 변화를 기대하며! 끝
'서유럽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국 시내여행 (0) | 2015.09.17 |
---|---|
프랑스 몽생미셸 (0) | 2015.09.17 |
프랑스 시내 여행(에펠타워, 노틀담 드 파리, 루브르) (0) | 2015.09.17 |
이탈리아 피렌체 (0) | 2015.09.17 |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여행 (0) | 2015.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