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행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몬주익과 고딕 지구

건축사 2015. 9. 17. 20:29

5/6 바르셀로나 고딕지구 및 몬주익 언덕을 돌아 보다.


오늘 이곳 바르셀로나에의 여행을 마무리 하면서 스페인의 역사에 대해서 돌아보고자 한다

일부러 공부하는 것 같으나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스페인 왕가와 역사를 모르고는 문화를 이해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하며 크게 피레네산맥을 경계로 프랑스와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 나라의 5배 넓이의 국토를 가지 있고 북쪽은 산악지역이 많고 추우며, 남쪽의 지중해를 접하고 있으며 평야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고 따뜻한 지역이다,

 

이베리아 반도는 기원전 131년 로마에 정복되어 400년간 지배당하고, 로마가 물러간 뒤에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 고트족이 내려와 409년에 왕국을 건설하고 지배 하였다. 따라서 아직도 스페인 곳곳에 수도교와 같은 로마 유적을 볼 수 있고, 또 스페인이 같은 서부 유럽의 프랑스보다 와인산업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가 서(西) 고트족의 지배로 인해 맥주 문화가 와인보다 발전한 이유라고 한다,

그러나 중세 필록세라라는 포도나무 병의 만연으로 인해 스페인을 제외한 프랑스 등 유럽의 포도나무가 모두 폐사하고 난 뒤 프랑스에 건너온 와인업자에 의한 제조기술이 스페인에 전수된 이후로 와인제조 기술이 발전하여 값싸고 질 좋은 와인이 대량으로 제조되어 수출 되고 있다고 한다, 만약 서 고트인이 지배하지 않았다면 이곳의 지질과 기후 연건 등이 타 유럽국가보다 우수하여 최고의 와인 제조/수출국이 되지 않았지 않나 생각해본다,

참고로 이 포도나무 병이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전염되지 않는 이유는 프랑스 국경에 있는 만년설이 덮인 피레네 산맥 때문이라고 한다.

 

711 – 1492년에는 북아프리카로부터 이슬람 무어족 조상이 지블롤터 해협을 건너와 이베리아 반도의 서 고트 왕국을 멸망 시키고 새로운 정복자가 되었다.

그 뒤 스페인은 오랫동안 이슬람 국가로 남아 있었는데. 스페인에서 이슬람 교도 후손을 무어인 이라고 부른다. 과다라마 산맥을 기준으로 이북은 기독교 세계와 남쪽 이슬람세계의 자연경계가 되었다.

아랍인들이 1492년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 스페인에는 무려 800년 동안 이슬람 문화가 뿌리 내림으로써 스페인은 유럽대륙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하면서도 가장 동양적인 냄새를 풍기는 이색지대가 되었던 것이다.

현재 스페인의 지중해에 근접한 지역인 따뜻하고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며 또 문화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인 카탈루냐와 안달루시아 지역은 8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이슬람 족의 지배를 받음으로 인해 대부분 무슬림에 기반을 둔 문화에 기독교 문화가 가미된 형태로 남아있는 이유이다.

스페인은 어떻게 보면 우리민족보다 더 힘들게 살아온 것 같이 동질감과 안쓰러움을 느끼게 한다.

 

아랍인들의 지배 아래 숨조차 제대로 못 쉬던 기독교들은 925년부터 국토회복을 위한 대장정에 나서면서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 카탈루냐 등의 기독교 왕국이 탄생하고 이 전쟁은 1469년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가 결혼하여 두 왕국이 통일되면서 결정적 계기를 맞았고 1492, 아랍인 무어족의 최후의 보루였던 그라나다 왕국을 함락시킴으로써 아랍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이사벨 왕은 우리나라 세종대왕과 같은 치적을 쌓은 왕으로 전국민으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으며,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왕이 아니 왕으로 불리 운다. 또한 연하의 페르난도 왕과 정략적인 결혼을 하여 이슬람을 쫓아내고 통일 국가를 건설하는 기틀을 마련할 뿐만 아니라 당시 어떤 국가에서도 투지를 꺼리던 이탈리아 출신 콜럼버스에게 신대륙 발견에 필요한 항해비용을 투자하여 향후 해양강국으로의 발전뿐만 아니라 신대륙으로부터의 부를 바탕으로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대왕이다

 

1492년은 또한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이기도 하여 스페인 역사에서 비약적 발전의 계기가 된 해로 평가되며, 1992년에 500주년을 맞아 바로셀로나 올림픽 등 대대적인 행사를 하였다.

 

스페인 통일을 이룩한 이사벨왕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계승 순위에 의해 그녀의 외손자인, 독일 황제 카를 5세가 스페인 왕으로 즉위하게 되어,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에 이르러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무진장 쏟아져 들어오는 황금을 바탕으로 유럽의 최대강국으로 떠오르면서 황금의 시기를 누린다.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에 대해서는 근친 결혼에 대한 기형(주걱턱)과 유전에 대해서는 세고비아 성에서 자세히 이야기토록 하겠다.

 

그러나 새롭게 부상하는 해양강국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에게 무적함대(조롱섞인 표현)라는

아르마다 함대가 궤멸되어 해상권이 영국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면서 스페인의 전성기는 끝나고 서서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에 되었다. 비운의 무적함대!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롤로스 2세가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루이14 세는 자신의 조카를 후계자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에 크게 반발한 합스부르크 왕가와 이른바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이 터지게 되었다.

13년 전쟁 끝에 루이 14세의 조카 앙주공 필리프가 펠리페 3세로 왕위에 오름으로써 프랑스의 스페인에 대한 간섭이 본격화되었다.

포르투갈 정벌을 이유로 스페인에 들어온 나폴레옹이 1808년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국왕으로 책봉하자 유혈폭동으로 시작된 독립전쟁은 나폴레옹 몰락 때까지 계속되어 1814, 드디어 페르난도 7세가 복위함으로써 스페인은 프랑스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기울어져 가는 스페인의 국력은 국제무대에서도 후퇴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고 1898년 최후의 식민지였던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마저 잃고 만다.

 

20세기에는 군대, 성직자, 대지주가 모든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국민은 가난과 핍박에 신음하던 때에 국민해방을 부르짖는 좌익 사상이 불길처럼 전국을 휩쓴 것은 당연한 시대의 흐름이었다 스페인 전국은 좌, 우익으로 갈라져 나라 전체가 혼돈과 무질서에 휩싸이고 말았다.

1936년 선거에서 좌익 정당인 민족전선이 승리하여 좌익정권이 성립되자 보수우익세력의 지원을 받는 프랑코장군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민족 상잔, 이른바 스페인 내전(1936-1939)이 터졌다.

이 전쟁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프랑코를 지원하고 소련이 공화파를 지원함으로써 국제 대리전의 양상을 띄었는데 전쟁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이웃 프랑스, 영국 등이 뜨뜻미지근한 중립 태세를 보임으로써 대세는 프랑코한테 유리하게 기울어,

1939, 바르셀로나 함락과 함께 프랑코는 스페인내란을 승리로 마감하고 공포의 암흑 통치를 펴기 시작했다. 이 전쟁으로 무려 60만명이 희생되었는데, 이 중 40만명은 프랑코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정치 희생자들이었다. 1975년 프랑코의 사망 때까지 무려 36년동안 공포, 독재정치가 이어졌다.

 

아래 기념비는 프랑코의 학살에 대항한 국제여단에 그 시대 양심을 지닌 지성인과 시민들은 결코 비겁하지 않고 참여하여 국제사회에 프랑코의 만행을 알리고 저항한 것을 기념하는 기념비로써 몬세라트 산 수도원 근방에 세워져 있다.

우리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분들이 스페인이 탄생시킨 지성과 양심을 지닌 지성인이라는 실을 부끄럽게도 나는 금번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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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조건>이라는 소설을 쓰고 후에는 프랑스 문화부 장관으로 일한 앙드레 말로,
<
게르니카>로 무차별학살을 고발한 게르니카의 파블로 피카소, 위대한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그리고 조지 오웰 등 수많은 세계의 지성인들이 무기와 펜과 사진기를 들고 스페인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을 기억하지 못해 올리지를 못한다, 미안함을 느낀다,

 

훗날 미국출신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스페인내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써서 내란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는데 동참하게 된다.

 

프랑코가 사라진 직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스페인은 매우 빠르게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변신해 가기 시작한다. 국왕 후안 카를로스는 현명한 국왕이었다.  그는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서민적인 생활을 하며 스페인의 민주화에 앞장섰는데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스페인의 경제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고, 또 프랑코의 암흑정치에 거부감을 가지고 스페인을 멀리했던 유럽 관광객들이 물밀 듯 몰려오기 시작하여 불과 20년 사이에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높은 국민 소득을 자랑하는 일등 국가의 대열에 설 수 있게 되었으며 1986년 스페인은 EU에 가입함으로써 진정한 유럽으로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이 나라도 과거 통일前 각 지역별 특색과 프랑코 시절의 카탈루냐 지역의 핍박에 따른 문제로 독립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통일국기에는 4개의 왕국이 통합되면서 그 문장인 케슬, 카스띠아, 아라곤, 라바라왕국 문장이 표기되어있다, 간혹 걸려있는 카탈루냐 독립정부 국기를 볼 수 가있다. 축구장에서는 더 자주 볼 수 있고,

 

너무 길게 설명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이 나라를 관광하는데 최소한 이 정도의 역사 상식은 알아야만 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기록한다.

 

바르셀로나 고딕지역

2일전 야경투어를 하였으나 오늘 다시 여정을 진행 해본다

먼저 오전에 입장하면 Free로 입장할 수 있다는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방문하였으며 이 성당은 13세에 순교한 아우렐리아 성녀를 수호성인으로 하는 대성당이며, 유해를 보관하고 있고 또 순교의 장면을 대리석벽화로 작성하여 전시해두고 있으며 13세를 의미하는 거위를 안뜰, 정원에서 키우고 있는 성당으로 13세기 고딕양식으로 건축된 대규모의 성전이며 많은 경당을 성전 내, 외부에 조성하여 기념하고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스페인 주교좌 대성당 (Cathedral) 

제대 상부

경당, 카펠라(Capella)

이어서 왕의 광장을 방문해본다,
왕의 이탈리아 출신의 콜럼버스가 자국에서는 대접을 못 받고 이곳 스페인 이사벨라 왕으로부터 항해를 지원받아 1492년 아메리카, 자신은 인도라고 알고 있었던 대륙을 발견하고 이곳에서 여왕께 알현하고 선물을 바쳤던 곳, 당시 이를 통해 막강한 스페인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이후 3백년간 식민지개척과 세계최강의 함대 및 국력을 보유했던 곳이다.

지금은 무명의 거리악사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명칭에 걸맞지 않게 좁고 고불고불한 거리들이 그 동안 힘겹게 살아온 나라 상황을 말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까지 하다.

왕의 광장

 

피카소의 아비용 거리의 여자들
피카소가 파리로 가서 유명해지기前 어릴 때부터 자랐던 이곳 바르셀로나 아비용 거리, 홍등가에 있었던 여인들을 그림으로 그려서 유명해진 아비용의 여자(처녀)”,
피카소는 파리에서 슬럼프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어릴 적 아비용 거리에서 본 여자들을 기억하고 그려(1907) 그의 미술이 발전하게 되었고 유명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좁다란 골목에 조그마한 가게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 거리 표지판만 이 거리임을 알려준다.  

          아비용 거리 표지                                   거리가 우리 뒷골목 같이 좁다.  

  피카소 아비용의 여자(처녀)

츄러스 가게,
어릴 때 먹었던 맛, 꽈배기와 비슷한 것을 설탕아나 초콜릿에 찍어 먹는 과자, 이 가게는 매우 조그마하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많이 찾고 있고 맛도 있다, 한 봉지를 사서 옆 성당뒤뜰에서 편하게 앉아 과일이랑 간식으로 맛있게 먹었다. 초콜릿에 듬뿍 찍어서 먹고 있는데 옆에서는 길거리 가수가 노래를, 공연을 하는데 우리를 위한 공연인 것 같다.

츄러스 

 길거리 공연 악사들 

 

레이알 광장
카탈루나 광장에서 지중해방향으로 남쪽대로가 람블라스 거리인데 주변에 명품점들이 위치해있고 가로 숲으로 그늘이 조성되어있어 걷고 산책하기에는 참 좋은 거리다,

이곳을 따라 10분쯤 내려가면 레이알 광장에 도착하는데 가우디의 초기/1879년 작품인 가로등을 볼 수 있다.

분수 뒷쪽을 자세히 보면 가우디의 초기 작품인 가로등 을 볼 수 있다


스페인 광장

고딕지역의 투어를 마치고 스페인광장을 통해 황영조로 인해 우리에게 익숙한 지역인 몬주익 언덕으로 올라간다, 스페인광장은 이곳에서는 Pl. Espena라고하는데 이곳에는 1920년대 만국박람회시에 건축한 대형의 분수가 있으며, 카탈루냐 미술관까지는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쉽게 올라올 수 있으며

스페인광장(Pl. Espena )                                                                

카탈루냐 미술관

스페인광장 분수 

 

이곳에서 좀 더 올라가면 1994년 올림픽 스타디움이 있고 또 근방에서는 몬주익 정상에 있는 군사박물관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Tele-fint?)가 운행중이라 쉽게 이용하여 둘러 볼 수 있었다.

이곳에는 우리의 마라톤 영웅 황영조 선수의 우승을 기념하는 한국/스페인의 기념공원이 있다고 하는데 찿을 수가 없었다.

1994년 올림픽 스타디움케이블카에서 바라본 바르셀로나 전경

 몬주익 정상에 있는 군사 박물관

몬주익 정상에서 바라본 항구 

 

 몬주익 중턱까지 연결된 지하철                                                

(지하철이 일정 기울기로 제작되어 이오선에만 왕복 운영됨)

중턱에서 정상까지 운영되는 케이블 카

 

그런데 오늘 이동예정인 그라나다까지는 국내선이라고 너무 여유를 부리다 비행기를 놓일뻔한 일이 있었다만 기차타는 것을 포기하고 택시를 이용하여 겨우 탑승을 하였다,

Chick in을 하러 도착한 시점이 탑승시점이라 짐 붙이는 것은 마감되어 그 큰 가방을 들고 들어가 Bridge에서 붙이는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그라나다로 오게 되었다잘못했으면 방랑자가 될뻔했다.
참 이상하게도 스페인 저가 Vueling항공을 두 번 이용하는 동안 계속 연착만하더니 이번에는 정시에 출발을 하더구나, 미운 놈!
Renfe
타러 Platform까지 들어갔다가 비용은 아까웠지만 과감하게 포기하고 다행히 택시를 탔고 택시운전사 또한 과속 운전을 해주어 겨우 탔구나. , 잘못되었으면 그라나다 일정이 많이 꼬일뻔했는데 참 다행이다.


여기서 내가 지금까지 각국의 비행기를 탔지만 기장이 이룩한다고 할 때와 Landing하고난 직후에 박수치고 부라보를 외치는 나라사람은 아마 스페인 사람뿐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하하, 이 일을 어떻게 받아 들려야 할지!


오늘 넘어가는 그라나다에서도 호텔이 넓고 좋았으면 좋겠다, 기대해본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여행!!

이 나라 역사를 보면서 어떻게 우리와 똑같이 슬픈고 힘들었던 역사를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과 이들에게 동질감과 안쓰러움을 내내 가지고 여행을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사벨라왕의 영광도, 프랑코 독재시절의 유럽에서 주변인으로서의 서러움도 다 잊어버리고 앞으로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에 있어서도 유럽 어떤 나라보다도 빠르게 성장하여 수년 내에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것으로 예상되며 나는 금번에 이 나라의 저력을 다시 보는 기회가 되었다

앞으로 안달루시아지방과 마드리드를 여행하면서 이 나라의 저력을 같이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바르셀로나는 지하철과 버스 노선이 잘 갖추어져 T10 Metro Ticket을 구입하면 경제적으로 시내교통을 이용할 수 있고, Hotel을 도심에 구하면 시내 관광지는 대부분 걸어서 다닐 수 있다,

이 나라는 유럽 어떤 나라보다도 와인, 과일 등 물산이 풍부하여 마음껏 즐기기를 바란다, 특히 나와 같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3유러짜리 와인을 매일 드시도록, 그래야 후회를 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