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행

스페인 톨레도성과 프라도 미술관

건축사 2015. 9. 17. 20:28

5/11월요일 톨레도 성과 프라도 미술관

 

오늘은 톨레도 성과 프라도 미술관을 들르다.

 

톨레도! 돈키호테가 산초 판사를 앞세우고 애마 노시난테를 타고 휘바람을 불며 나타날 같은 돈키호테의 무대 톨레도, 시간이 멈춘 같은 중세의 도시,


마드리드에서 이곳까지 시외버스가 정기적으로 운행되며, 내가 버스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 라만차 들판을 달려간다, 라만차, 매마른 , 아니다. 부러운 들판이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들판, 벌써 계절이 초여름 같아 들판의 밀과 보리는 풍요의 색인 노란 빛을 띠기 시작한다,
길가에는 양귀비 꽃이 만발하고 이름 모를 보라색 꽃들이 흐드러지게 우리의 톨레도행을, 개선을 반기는 같구나.

없이 펼처진 들판


먼저 택시를 타고 전망이 좋다는 파라도르(스페인 국가에서 운영하는 호텔이며, 왕실 소유의 성과 기념물을 현대식 Hotel 개조하여 스페인 전역에 영업 중이며 모두 고급이고 경관이 탁월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비싸서 이용 하지를 못했다, 론다의 뉴에보 다리 옆에 있는 파라도르는 정말 좋다고 하던데, 보기만 했다)에 올라서 톨레도, 아름다운 중세 성곽 도시 전체를 조망하였다.

 

로마시대에는 똘레툼, 톨레라툼이라 불렀고 "항복하지 않는 "이란 뜻을 가지며, 8세기부터 이슬람이 지배했으나 13세기이후 가톨릭에서 회복하여 알카자르를 건축(14세기, 개축 16세기) 하였으며, 주변에 타오 (970km) 흐르고 있다.

  파라도르 전망대에서 바라본 톨레토 전경, 장방형의 알카자르가 보이고 주변에는 타오강이 흐르고 있다.

   대성당의 모습도 오른쪽 사진에 보인다, 정말 아름다운 중세 성곽 도시이다

                           

전망대에서 걸어내려 오며, 톨레도 시내를 구석구석 돌아본다

 

산토 토메
조그만 성당인 산토 토메 성당에 들른다, 야박하게도 성당은 보여주지 않고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그림만 내고 사진도 찍게 하고 보고만 가란다, 그림을 그리게 동기는 오르가즈 백작이 살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은덕을 많이 베풀었고 죽어서도 재산을 교회에 봉헌했으나 유족이 2세기동안 미루다가 그것도 뒤늦게 백작의 재산을 기부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찾아서 교황청에서 자손들과의 중재로 봉헌하게 되었지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성당에서 그레코에게 의뢰해서 그린 그림이다,

성화의 내용은 백작을 안장할 하늘에서 성인이 내려와 안장한 기적을 그렸으며, 맞아 죽은 스테판 성인과 어거스틴 성인이 그려져 있고, 1500년경 무채색 바탕에 이성적인 비례가 아닌 비대칭. 르네상스 풍이 아닌 메너리즘 풍의 그림으로
공간과 선이 두드러지지 않게 그림으로  그림에 등장하는 조문객도 평소 자신을 후원한 후원가들의 후원 정도에 따라 실존 인물을 그렸다고 한다, 자신의 아들과 본인의 모습도 그리고, 여성으로는 성모마리아와 펠리페2세도 그려 넣어서 버림받은 ( 그레코는 펠리페 왕의 궁중화가로 있었으나 쫓겨나서 이곳 톨레도에 있었음.) 대한 미련도 표현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린 그레코는 생전에는 크게 환영 받지 못한 화가였으나 사후(死後) 메너리즘 화풍의 대표적인 화가로 평가 받고 있다.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그림(인터넷에서 퍼옴,                                                 산토도메 성당 입구 전면

 

톨레도 대성당 

이어서 대성당을 둘러보았다
출입문 3개는 용서, 심판, 지옥의 문으로 부리고 있었으며 중앙문인 중앙에 있는 심판의 문은 얼마 교황님께서 방문했을 열렸다고 한다, 보통은 희년(가톨릭에서는 50 마다 오는 해를 희년으로 하여 회개하고 보속을 한다)에는 열려서 사면을 하는 문으로 알고 있지만,
대성당내에는 비록 13세기에 이슬람을 쫓아 내었지만 개종한 이슬람과의 융화를 위해 대성전내 부분의 공간을 내부천정에 이슬람예배당으로 녹색 금색 등으로 꾸며 예배를 보게 했다고 한다.대성당 정면  출입문 3개는 용서, 심판, 지옥의 문을 상징 한다

 

내부한 한켠엔 크리스토퍼 성인(제일 힘이 성인) 그려두었는데 성인은 예수그리스도를 안고 개울을 건너드린 성인으로 여행객의 수호성인이다.

 

먼저 대성당도 대단하다는 것을 먼저 표현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같다, 비록 일전 방문한 세비야 대성당보다는 규모가 적지만 톨레토 성당은 그대로 최고의 성당이라 평하고 싶다.성전 내부 전경, 아치와 리브로 구성되어져 있다.

 

중앙 제대는 성전건물의 십자교차점에 위치하며, 이는 전형적인 성전 건축양식이다. 세비야와 같이 황금장식을 위해 180KG? 사용되었다고 한다. 제대 뒤편은 성서내용인 예수의 일생을 장식으로 표현했는데 중세에 모든 성당에서와 같이 무지한 신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성모마리아의 수태고지에서부터 탄생, 부활까지 성서내용을 조각과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정말 화려하다. 

제대와 뒤편 장식 (직접 찍은 사진)                                     (인테넷에서 퍼온 사진 보다 선명함)

 

성가대

제대앞쪽은 성가대석으로 성직자들이 기도(특히 성무 일도) 있고 파이프오르간이 설치 되어져 있으며 과거는 성직자들이 매일 아침 기도공간으로 사용되고 비밀의 문을 통해 오르간 연주를 하는 곳으로 올라 있으며, 정말 이곳 또한 꾸며져 있다, 중후하다.
대성전을 건축하게 동기는 1400년경 작가였던 신부님께서 꿈속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시어 천을 쉬움으로 대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성당 내에 보관되어져 있는 성모님께서 발현한 돌을 만시면 습기생기고 손을 떼면 근방 말라버리는 기적이 생긴다고 하는데 나는 신심이 약해서인지 그렇지 않는 같다.

예수회의 소명인 IHS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라는 뜻으로 성가대석 상부 대주교 의자에 조각되어져 있다.

성가대 석                                                                                                                                        예수회의 소명인 IHS가 기록된 주교좌(座)

 

트랜스빠란떼

제대 뒤쪽에는 트랜스빠란떼라는 성령의 빛을 조각해두었는데 빛을 통한 성령강림을 표현한 작품인데 멋진 작품인 같다. 자연의 빛을 어떻게 작품에 담을까를 고민 하다가 뒷면을 창으로 하여 빛을 받아드린 것은 좋은 아이디어인 같다.

트랜스빠란떼로 빛이 들어오는 곳(천창)                                                           트랜스빠란떼

 

 주교들의방
종교회의를 주제하는 곳으로 재임주교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연옥과 심판에 대한 성화가 있는데, 7가지의  죄에 대한 내용을 성화로 그려져 있다. 자만과 교만, 물욕, 성욕, 시기와 질투, 식욕, 분노, 나태함이다,

  주교의 방에 그려진 성화(윗쪽)와 재임 주교의 초상(아래)

 

그레코의 샤크리티아,

예수의 옷을 벗김 성화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간 우리가 성화에서 없었던 작가만의 특징을 표현했는데 중지와 약지를 붙여서 그리고, 예수님 상이 편안한 얼굴이며 십자가 고난 갈비뼈에 창을 찌른 병사도 그렸다.
중세 성화에서와 다르게 예수의 위치가 최고 높은 위치가 아니라 둘러 쌓여있고 평범한 위치를 잡고 있다, 아래 사진은 내가 찍은 사진이 선명치 못하여 인터넷에서 왔다.

그레코는 메너리즘 화풍의 회화를 그렸는데 메너리즘이란 16세기 중엽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화풍을 차용하여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기교를 부린 양식을 격멸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20세기 이후 긍정적으로 평가를 받게 되었으며 그레코가 대표적인 화가이며 그의 작품으로 인해 서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을 찾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곳 보물실에는 보물급의 , 성물과 성화 많이 전시되어있었으며 특히

이곳에는 이동이 가능한콜퍼스 크리스티라는 성체현시대(顯示臺) 120KG 보석을 사용하여
1549
9 완성하여 보관 중인데 아름다움과 화려함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같다. 현재에도 매년 한번씩 나들이를 한다고 한다.

 

양피지에 쓴 성서                                                                                          조각 상

엘 그레코의 예수의 옷을 벗김. (퍼옴)                                                       “콜퍼스 크리스티”라는 성체현시대(顯示臺)

 

톨레도, 이 도시의 타오르는 태양을 상징하는 태양문을 지나 좁은 골목 길을 돌아 돌아 가며 시내를 돌아 본다

골목이며, 건물이며, 가게며, 카페며 모두가 볼거리이고 역사와 문화이다.

     

이곳에는 명물과자 마사판(Mazapan)으로 유명한 과자점 산토토메(1856 개점) 들러서 과자도 맛을 본다, 맛은 있으나 너무 비싸다. 아몬드 가루에 달걀 노란자와 꿀을 넣어 구워냈다고 한다 너무 달아서 조금은 흠이지만 피로가 가시는 같다.

 

또한 이곳은 중세 기사들의 복장과 장신구가 다양하게 전시되고 판매를 하고 있다. 마치 중세의 거리를 다니는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거리 곳곳에 카페가 있어 쉬어가며 여행을 즐길 있다,

카페                                                                              마사판(Mazapan) 과자점(산토 토메)

좁은 골목의 톨레도 시가지, 모든 건축물과 장소가 문화 유적이다.

        중세 기사들의 복장과 칼 등 장신구가 다양하게 전시

까를로스1 문장과 이슬람 건축양식인 말발굽 모양의 성스러운 문이란 이름을 가지 비사그라 문을 통과하여 마드리드 시내로 다시 돌아온다      

  

 

 

프라도 미술관

 

오후에 시내로 들어와 시내중심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는 세계3대미술관중의 하나인 프라도 미술관으로 지하철을 이용해 이동한다

 

 영국의 National Gallery 프랑스 오르세 그리고 스페인 이곳을 말하는데 다른 미술관은 모두 주된 전시작품이 약탈한 작품이라면 이곳 스페인왕가의 소장작품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하니 정말 스페인을 다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라의 역사를 보아도 15세기이후 이슬람을 몰아내고 가톨릭 통일국가를 건설하고 아메리카를 발견하여 식민지화하여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 아니라 스페인이었는데 합수부르크 왕가와의 혼인에 따른 유전병과 무능한 펠리페 3,4세를 거치는 동안 선대 이사벨 왕이 남기 위대한 유산과 정신을 말아 먹어버린 왕가와 나폴레옹과 야합한 귀족만 아니었어도 현재의 세계의 공용어는 영어가 아니라 스페인어이고, 문화와 예술도 스페인이 주도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을 차로 이동하면서 광활한 평야와 좋은 날씨 모든 면에서 유리한 여건을 갖춘 나라 인데, 그리고 1000년전 찬란했던 예술, 건축과 문화를 보노라면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같은 시련을 겪은 동질감 때문인지는 모르겠다만,

 

프라도 미술관

미술관은 미술관과 달리 실내에서 전시품을 사진으로 남길 수가 없어서 아쉬움이 있지만 기억을 되살려 간단히 소개한다,

소개된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왔음을 밝힌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으신 분들의 용기? 감탄하며 기억을 더듬어 가이드 받은 내용과 나의 느낌을 기록해본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사고가 조금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면이 감성적인 면보다 강해서인지 음악과 예술, 인문학에 약한 것을 느끼고 갈증을 느껴왔었다

그래서인지 미술에 대한 나의 지식은 아니 식견은 내가 평가를 하드라도 거의 초딩 수준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래도 금번 유럽 여행을 통해서 회화를 보는 시야와 식견을 조금은 배울 있는 기회가 되었음을 감히 말씀 드리고 기록하는바 이해를 하고 읽어 주시면 감사.

 

먼저 회화나 조각 예술품을 감상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보는 시각도 중요하지만 성화든 풍경화든 인물화든 또는 중세봉건주의 시대 회화나 인상파, 메너리즘이든지 모든 그림에는 시대의 모습이, 생활이, 정치와 문화가 깃들어있으며 특히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들어있는바 그것을 모르고 예술을 감상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특히 작가들이 자신만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나 기법을 알고, 작가의 당시 개인적인 상황이나 입장도 이해한 상황에서만 진정한 예술 감상이 가능함을 조금은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림 속에 있는 작가의 Touch 하나 하나에 보여지는 의미 외에 숨겨진 의미를 찾고 이를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예술감상이 가능함을 조금은 알게 기회였다  

프라도 미술관 입구                                                                          고야의동상

                                                                                                          동상 아래에는 대표작인 마하 누드상이   위에는 날개가 달린 골롬 상이 있다 

 

전시된 주요화가와 작품에 대한 내용을 간단히 기술 한다.

 

l  독일화가 뒤러(르네상스)
아담과 이브는 선() 해부학까지를 동원한 아름다운 인체를 묘사했고, 사과는 단순히 선악과가 아니라 신과 인간과 자연의 완전한 조화를 추구한 르네상스의 이상을 전달하는 매체인 것이다
자화상은(27) 측면을 강조했고 30세에는 정면을 강조했다고 한다.

l  프라 젤리코의 수태고지에서 가브리엘 대천사와 성모님을 그렸고

l  이엘 보쉬가 그린 쾌락의 정원 에서는
 
  : 성욕의 죄악을 나타내었고
 
가운데: 성적인 쾌락을 표현했으며,  토끼는 다산 상징한다

 우  :  심판 지옥에 대한 표현으로 당시 부패한 사회상 그렸고

         그림에 표기된 에덴의 동산과 검은 물은 죄와 이브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

       

l  미켈란젤로 화가들이 죽은 메너리즘이 등장했으며
그레코는 과도기 화가로써 그는 선을 찾을 없는 그림을 그렸고
인물의 손가락 중지와 약지 합해져 그리는 경향이 있다.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 잘생기지 않게 그리고, 손가락 붙임, 눈에 빛을 표현, 생동감, 피카소 영향 줌

 

l  .벨라스케스의 파쿠스 승리에는  최초로 회화에 술이 등장하고

술병,잔과 포도나무관이 등장하며 주변인물로 취한 농부의 얼굴, 동네 아저씨와 같은 얼굴을 그리는

 가식이 없다.

  사실 17세기 이전까지는 이렇게 활짝 웃는 사람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그린 화가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 근엄

 하거나 슬픈 표정이 대부분이었고 웃더라도 미소 정도였다. 웃고 있는 아저씨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옆으로 들이민 다른 아저씨를 보자. 술을 마셨는지 코는 벌써 빨개졌고 웃음을 머금은 눈빛은 취해서 기분 좋아진 사람의 것이다. 벨라스케스는 누군가 그렸던 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숙한 방식대로 그림을 그리않았고 그의 관찰력을 100% 이용해서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당시 취한 아저씨들의 모습을 그리스/

로마 신화의 장면에 끼워 넣었다.
  

l   라스메니나스 시녀들 벨라스케스 작품 이다
 
꼬마여자 펠리페4세의 딸과 부부, 빛을 처음 도입하여 그린 그림이고 .향후 인상파는 빛을   표착하는 화파로 발전한다,

 

l   루벤스가 그린 동방박사 경배.

 루벤스의 그림에서도 그런 전통적 동방박사들을 만날 수 있다. 배경은 누추하지만 여왕 같은 위엄과 아름다움을 갖춘 성모와 아기 예수가 왕과 같은 차림새의 인물들을 맞아 축복을 내리고 있다. 모피와 벨벳, 비단으로 지은 그들의 화려한 의상은 경배자들의 신분을 나타내고 터번은 그들이 중동 지역에서 왔음을 암시한다. 이 모든 화려한 인물들에도 불구하고, 또 마리아와 아기가 한쪽으로 쏠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모자가 그림의 중심으로 느껴지는 것은 역시 화면에서 가장 밝은 빛을 받고 있는 것이 성 모자이기 때문이다(마리아의 흰 의상도 한몫을 한다).

            루벤스가 그린 동방박사 경배                                                                                                     삼마산

                                                                            

l  삼미신

루벤스의 가장 만년작인 이 그림은 현재 프라도 미술관이 자랑하는 명품중의 하나다단순한 화면 구성 속에 루벤스의 모든 역량이 세 여체 표현에 주입되어 있다.

주제 그 자체는 이미 고대 그리이스 조각에서 자주 다루어졌던 것이고, 그림의 수법은 르네상스의 보티첼리와 라파엘로 등에 의해 이상화하고 미화한 형상의 계승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체의 아름다움이 한층 내적인 충만감을 수반하고 있다.

바로크의 힘찬 성숙기를 나타내 주는 그 그림과원숙의 극에 달하여 최후의 여체 찬미를 구가한 이 그림 사이에는, 루벤스 예술의 끝없는 심화와 전개가 엿보인다

 

l  카를로스. 4 왕의 가족 고야왕비 중앙에 위치시킴으로써 당시 왕비가 정치의 중심에 있음을 회화로 표현했다, 고야는 벨라스케스의 화풍을 따라했으며 딱딱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를 그렸다.

l  옷을 벗은/ 입은 마하

 

    두 작품은 모두 1803년 스페인의 재상 마누엘 고도이(Manuel Godoy)의 저택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엄격한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에서 감히 <옷 벗은 마야>를 내걸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고도이는 <옷을 입은 마하를 걸어둔 벽을 밀어서 한 바퀴 돌리면 <옷을 벗은 마하>가 나오는 비밀 공간을 만들어놓고 사람들과 함께 즐겼다는 속설이 있다<옷을 벗은 마하> 1800년에 먼저 그려졌고, 몇 년 뒤에 <옷을 입은 마하>가 그려졌다.

 

     고야는 왜 두 개의 <마하>를 그렸을까? 이 수수께끼를 푸는 중요한 열쇠는 그림의 모델이 쥐고 있다. 고야는 모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가장 유력한 후보는 고야의 애인이었던 알바 공작부인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녀는 고야에게 그야말로 미의 여신 비너스 같은 존재였다. 고야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집에 걸어두었던 그녀의 또 다른 초상화에서 그녀를 향한 고야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녀가 오른손의 검지로 가리키는 아래쪽에 ‘Goya(고야)’라고 서명하고 그 옆에 ‘Solo'를 써놓았다. , ‘Solo Goya'고야뿐이라는 의미다. 또 그녀의 손가락에 낀 반지에는 두 사람의 머리글자를 새겨놓기도 했다.

 

    미술사상 최초의 누드화는 고야의 <옷을 벗은 마야>이다.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에도 누드화가 그려졌지만 그것은 신을 그린 것이었고, 인간 여성을 그린 누드화는 <옷을 벗은 마야>가 처음이었다. 그 때문에 고야는 결국 이단으로 몰려 교회의 심문을 받았다.

 

     한편에서는 마하가 알바 공작부인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공작부인의 초상화와 마하닮지 않았고, 제작  기간이 고야와 공작부인이 밀회를 거듭했던 시기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옷을 벗은 마하>는 재상 고도이의 주문으로 그린 것인데, 사랑하는 사람의 알몸을 타인의 주문을 받고 그리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마하의 모델이 재상의 애인이었던 페피타 투토라는 설에 힘을 실어준다. 투토의 초상화를 보면 확실히 마하와 닮았다. 고도이는 당시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의 애인이기도 해서 왕비의 총애를 믿고 제 멋대로 행동했다. 그는 또 바람둥이답게 권력을 앞세워 유명 화가들의 누드화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런 고도이라면 자신의 애인을 모델로 세우고 <옷을 벗은 마하>를 그리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l  로이드 베이덴의 "내려지는 예수"

빨간모자를 아리마데 요셉과 호사스런 옷을 입은 니고데모가 내려지는 예수를 하얀 천으로 감싼다, 붉은 옷을 요한이 넋을 잃고 혼절하는 마리아를 급하게 부축하고 있다, 하얀 두건을 마리아는 얼굴에 핏기를 잃고 깊은 슬픔으로 흘린 눈물 자국이 남아 있다

요한의 밑에 있는 해골이 원죄를 상징하고 예수님 발쪽의 막랄리나 마리아는 손을 모으고 슬픔에 젖어있다

십자가에 내려지는 사실적인 사건보다는 인간 내면에 깊이 파고드는 비통함을 화가는 끌어내어 없는 비극적인 비통함의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마리아의 자세도 예수의 고통을 경험했다고 생각하여 내려지는 예수님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로이드 반 베이덴의"내려지는 예수"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l  '고야'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고야의 후기 작품 검은 그림  유명한 작품

사투르누스는 크로노스로 알려진 시간의 인데, 신화를 기반으로 고야는 아들을 뜯어먹는 모습을 그렸다.

그림에서는 당시 많은 전쟁이 발생하고, 왕실이 타락한 절망적이고 희망 없는 상황을 암시하고 인간의 악마적 본성과 폭력적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

조금은 끔찍하기도 하고 징그러워서 그런지 고야의 검은 그림 중에 그림이 가장 기억에 남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스페인의 왕가

오늘은 스페인의 왕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15세기 스페인의 왕국 아라곤(페르난도왕 )과 카스티나(이사벨왕)이 결혼하여 800년간 스페인을 점령하던 무슬림 무어족을 몰아내고 스페인을 통일 한 후 아들이 없어 공주인 후아나가 신성로마제국의 왕가인 합스부르크(Habsburg)家와 혼인하여 카를로스1(합스부르크가 카롤5) 왕이 되고 이어 아들인 필리페2(1556-1598)가 왕위를 잇는다, 펠리페2세는 영국의 메리 튜터와 결혼하고, 이후 '무적함대'를 거느리고 메리 튜터의 뒤를 이은 엘리자베스1세와 전쟁을 벌인다, 펠리페2세는 이 전쟁에서 패한 뒤 스페인은 점차 쇠락해간다, 아래의 계보를 통해 그 흐름을 집을 수 있다.

필리페2세는 서류왕 이라고 칭하며 이는 유전으로 인한 주걱턱으로 발음이 정확하지 못하고 대인 기피증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고 하며, 서류에 묻혀 심사 숙고하는 극단적인 신중함과 우유부단함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아버지 카를로스1세로부터 막대한 영토를 물려 받았으나 만족하지 않고 영토확장 정책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포로투칼를 점령하여 편입시켰고, 아메리카대륙에서는 맥시코를, 아시아에서는 필리핀을 편입하여 해 가지지 않는 나라로써의 막강한 국력을 유지한 군주였으나 정치적 도덕적인 군주는 되지 못하였다.

영국의 메리 여왕과 결혼하였으나 11살이나 연상인 여왕과 소원하였다고 하며 이로인해 메리 여왕이 왕의 사랑을 얻기 위해 신교도를 화형(火刑)하는 등 무참히 살육하여 영국의 블러드 메리, 피의 여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오늘 저녁에는 칵테일 블러드 메리를 맛보아야겠다.

메리 여왕 사후 처제인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청혼하였으나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는 이유를 들어 청혼을 거절하고 적대관계에 놓이며, 나중 스페인 펠리페2세왕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스페인을 몰락하게 하는 악연이 이어진다.

 

또한 그는 6번의 결혼 중 2번은 그의 미치광이 아들인 돈 카를로즈의 약혼녀와 결혼하게되는데 정말 우리 동양적인 사고로는 이해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이들과의 갈등으로 골방에 가두어 굶어 죽이는 스페인 판 시도세자가 된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외가인 네덜란드가문의 유전병인 미치광이(정신병)로 태어났으며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즈는 펠리페2세의 3번째왕비가된 돈 카를로즈 약혼녀인 엘리자베스 드 발루아와 결혼하여 아들과의 갈등을 내용으로 하는 주제로 하여 탄생하게 된다

특히 네번째 아내도 아들의 약혼녀로 아들이 죽자 결혼을 했는데 그녀는 펠리페2세 자신의 외조카로써 외삼촌과 결혼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합수부르크 가문은 가문(家門)() 근친간 결혼으로 심각한 유전적 질환, 주걱턱 등을 가지고 태어났고 마리앙투아네트 왕비도 그 가문출신으로 주걱턱이었다고 한다.

 

무적함대와 관련하여 1571년 당시에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함대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는 해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출항(出港)() 무적함대의 해전에 능한 사령관인 바산이 갑자기 죽음으로 인해 펠리페 2세가 경험 없는 행정가를 임명했고 또 본격적인 해전도 하기전에 기상 악화로130척의 함정 중 50척을 잃었으며, 반면에 영국군은 해상에 능한 해적을 부 제독으로 삼아 무적함대를 격파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스페인은 지중해에 뿐만 아니라 영국에 많은 영향권을 내어주게 된다.

  심각한 주걱턱 유전

          펠리페 2                                     카를로스2